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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정축보(丁丑譜) 서문 (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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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2.정축보(丁丑譜) 발문(跋文)
  • 03.갑진보(甲辰譜) 서문 (1724년)-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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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8.정사보(丁巳譜) 마무리글 (1917년)-해설
  • 09.병신보(丙申譜) 서문(1956년)-해설
  • 10.기미(己未)보서 (1979년)
  • 11.기미보 간행사(1979년)
  • 12.기미보 간행축사 (1979년)

족보(族譜)는 나 자신의 근원과 우리 종족의 발전과정을 볼 수 있는 씨족사(氏族史)요, 나아가 민족사의 근원이 되는 극히 중대한 사적(史的) 자료이다. 특히 서구문명의 물결에 휘말려 우리 고유의 미풍양속은 날로 쇠퇴(衰退)해 가고 대가족 제도가 핵가족 제도로, 경로효친사상(敬老孝親思想)이 배금배권사상(拜金拜權思想)으로 변모하여 자신의 존재근원마저 망각하는 신세대들의 풍속도가 날로 확산(擴散)되어 가고 있는 요즈음 우리는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훌륭한 보전(寶典)을 모셨기에 한 조상을 모신 한 핏줄이란 것을 자각하여 가족제도 붕괴(崩壞)의 시대적인 폐해(弊害)를 막을 수 있음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다.

오늘날 문명의 혜택을 최대로 누리고 있는 우리도 감히 성취하기 어려운 갑진보(甲辰譜)를 1724년 당시의 열악한 교통 및 통신수단에도 불구하고 최초로 수합(收合) 발간(發刊) 하시고 1979년 기미보(己未譜)에 이르기까지 이를 보완(補完) 보존(保存)해 주신 선대의 노고와 은덕(恩德)에 먼저 고개 숙여 감사드리며 이를 손색(遜色)없이 계승(繼承)시키는 것이 우리의 책무(責務)일 것이다.

우리 후손(後孫)들은 이러한 선대(先代)의 위업(偉業)을 계승(繼承)키 위하여 시대의 변천(變遷)에 따라 전국이 일일생활권(一日生活圈)으로 형성되에 이주범위(移住範圍)가 넓어지고 이산(離散)이 빈번(頻繁)할 뿐만 아니라 인구증가에 따른 수보(修譜)의 필요성과 잊혀져지는 계보(系譜)를 재조명(再照明)하고 흩어진 종친(宗親)을 발굴결집(發掘結集) 해야 한다는 중의(衆義)에 따라 매(每) 30년을 주기(週期)로 수보(修譜)하던 관례(慣例)를 깨고1996년 3월 31일 개최된 대종회(大宗會) 총회(總會)의 결의(決議)를 거쳐 이번 제(第) 8차는 앞당겨 단행(斷行)케 되었다.

이번 족보간행(族譜刊行)에 있어 한분의 종친이라도 더 발굴키 위하여 2회에 걸쳐 중앙일간지(한국일보 1996년 11월 16일과 11월 26일)에 광고하고 납단(納單)기일도 1996년 말에서 1997년 4월말로 연기하였으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불참한 종친이 있었음은 유감스런 일이며 특히 북한땅에도 우리 종친이 산거하면서 이번 족보간행에 참여치 못한 채 기아(飢餓)에 허덕이고 있음을 생각할 때 실로 애처롭고 안타깝기 그지없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가지와 잎이 무성하고 아름다운 꽃과 탐스러운 열매을 얻을 수 있고 근원이 깊은 샘은 큰 강을 이루어 바다로 들어가듯이 우리 성씨는 현왕설(玄王契)을 뿌리로 모신 후손답게 크게 번창하여 은왕(殷王) 성탕(成湯)에 이르러서는 중국을 통일하고 황하문명을 이루었으며 행주 은씨의 시조이신 휘(諱) 홍열(洪悅)공은 신라문성왕의 초빙으로 8학사중 한 분으로 당나라에서 오셔서 행주(幸州)에 존거하시면서 학문과 예악을 가르치셨으니 국가와 사회에 헌신한 공이 커서 태자태사(太子太師)의 벼슬과 정양(定襄)이란 시호(諡號)를 받으셨으며 후손 또한 많은 충신과 문무명신을 배출하여 국가와 사회발전, 그리고 국가보위에 공을 세워 그 빛나는 행적이 국가 기록문서와 우리 족보에 수록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 족보가 종계(宗系)와 지파(支派)를 갖추기 시작한 월담(月潭)공 휘(諱)여림(汝霖)은 조선 세종조에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었으며 오례지의(五禮之儀)를 정하고 삼강지실(三綱之實)을 지어 문화발전에 큰 공훈을 세우셨다.

공은 슬하에 세분 아들을 두셨으니 휘(諱) 현(顯)은 통헌대부(通憲大夫)로 군위(軍威)ㆍ인동파(仁同派) 파조(派租)가 되셨고 휘(諱) 보(輔)는 해주판관(海州判官)으로 고부(古阜)ㆍ태인파(泰仁派) 파조(派租)가 되셨으며 휘(諱) 익(翊)은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로서 대구(大邱)ㆍ경산파(慶山派) 파조(派租)가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우리 은씨 가문은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명문대가의 후손답게 수세기에 걸쳐 명성을 떨쳤건만 오늘의 현실은 다소 침체(沈滯)된 감이 있으나 우리 후손은 어느 성씨 못지 않게 조상을 흠모(欽慕)하는 정신이 투철하고 무한한 잠재력을 가졌기에 앞으로 더욱 융성할 것을 확신하는 바이다.

이번 제 8차 족보간행을 계기로 과거를 거울삼아 현실을 자성하고 대종회를 구심점으로 하여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에 따라 남달리 귀한 우리 성씨는 남다른 종친애로서 서로 친목을 도모하고 상부상조 하면서 국제화 정보화 시대에 걸맞는 많은 후세들을 배출하여 옛날의 영화를 되찾음은 물론 미래를 열어 나가는 것이 우리의 당면과제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보첩(譜牒)을 통하여 선대의 고귀한 유지를 받들고 위대한 공덕을 현양(顯揚)하는 것이 후손된 도리일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가 종친간에 확산 되어가고 있는 가운데 뜻있는 종친들께서 조상을 흠모(欽慕)하고 종친의 발전을 위하여 많은 노력과 시간 그리고 재물을 헌납하여 주셔서 시조(始祖) 정양공(定襄公)의 설단(設壇)을 모시고(1984년~1992년) 숭모제(崇慕齊)를 건립(1992년~1994년) 하였으며 송강제(松岡齊)를 중수(1989년)하고 판서공(判書公)의 실묘(實墓)를 찾아서 이장(移葬)(1992년), 수갈(竪碣)(1995년) 하였으며 대전시 중구 침산(砧山)동 소재 뿌리공원에 우리 성씨의 유래에 관한 유래비(由來碑)을 건립(1997년)함으로써 자랑스러운 우리 성씨의 유래를 만천하에 공개할 수 있게 되어 인륜(人倫)이 날로 떨어져 가고 있는 이 각박한 시대에 그나마 후손된 도리를 조금이라도 하지 않았나 생각 되는바 있으나 시조(始祖)정양공(定襄公)의 실묘(實墓)가 파주 파평산에 실존하다는 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찾지 못한 점 우리 후손들의 노력 부족이라 할까, 지혜(智慧) 부족이 아니었는가를 생각할 때 부끄럽기 짝이 없다.

이번 제 8차 족보간행에 그동안 협력과 성원을 보내주신 각파 문중과 종친, 그리고 족보편찬위원회의 임원들게 감사드리며, 특히 재경 고문님들과 희천(熙天) 편찬위원장과 응상(應相)종친의 각별한 관심으로 참여 하여 주시고 특히 수권(首卷)을 재 인쇄함에 생업을 뒤로하시고 교정(敎正)을 봐 주신 군위(軍威)문중(門中) 종문(鍾雯) 도유사(都有司)의 헌신적인 노고가 있어서 우리 종친 모두가 염원하던 새로운 족보(族譜)가 드디어 완성되어 발간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이 거대한 보사(譜事)를 마치면서 일부 문중(門中)과 종친(宗親)께서 애써 마련하여 주신 재료를 이번 족보(族譜)편찬(編纂)에 반영치 못한 점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앞으로 조상의 새로운 행적(行迹)이나 사실이 발견된다면 다음 개보(改譜)시 수정보완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며 수권(首卷)에 수록된 세덕록(世德錄)중 파조(波祖)이하는 각파보(各派譜)에 수록하여야 한다고 강력한 논의가 있었으나 기(旣)히 족보가 편찬(編纂)되었고 수권(首卷)만 재인쇄하는 터에 이것을 반영할 방법이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바라건대 차기 수(修)보(譜)에는 후손들이 이점에 깊이 있는 연구가 있기를 바랄 뿐이다.

끝으로 그동안의 종친 여러분의 협력과 관계임원 여러분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리면서 우리 종친 모두의 가정에 항상 건강과 행운이 충만하시고 우리 행주(幸州) 은(殷)씨의 만세융창(萬歲隆昌)을 기원하는 바입니다.

1996년(정축) 10월
행주은씨 대종회장 38세손 희중 근찬(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