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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백계(栢溪)선생 휘(諱) 정화(鼎和) 행장
  • 01.백계(栢溪)선생 휘(諱) 정화(鼎和) 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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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6.행주은씨 성암(成岩) 세효비문

공의 휘는 정화(鼎和)요 자는 매경(梅卿) 이며 아호는 백계(栢溪)선생이다. 그의 선대는 행주(幸州) 사람이다. 선고의 휘는 지로(之輅)이며 문장과 덕행이 있었고 선비 (어머님)는 경주(慶州)정(鄭)씨로 그 아버지는 덕봉(德鳳)이오 참봉 묵재 언충(彦忠)의 후손이었다. 효종(孝宗)왕 경인년(1650年)11월 24일에 태인현(정읍군태인현)의 동촌면 십여정리에서 태어나셨다.

분만되시는 날밤에 선고의 꿈에 한 노인이 학창 옷을 입고 갈관을 쓰고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구름신발을 신고 왼편엔 하도(河圖), 바른편엔 낙서(洛書)를 들고 와 무릎을 꿇고 나와 천제의 명령입니다. 한 후에 인홀불견이어서 놀라 일어나 보니 구름 그림자는 문에 있고 향기가 방에 가득하였다 한다.

공의 타고난 성품이 단정하시고 지조가 고결하며 효도와 우애가 지극함이 진실로 천성이었다. 5, 6세 때에 선고께 글을 베우실 제 총명하고 영특하여 이미 일반 아이들보다 뛰어났었다. 문득 배운바 있는 추구(책이름)에 「달이 뜨니 하늘이 눈을 떴고 산이 높아 땅이 머리를 들었구나.」라는 한 수를 들어 말하되 이 시를 지은이의 마음 씀이 자못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달 말고도 해가 있는데 유독 달이 하늘의 눈이라 할 수 있으며 산 밖에 또 산이 있으니 산이 모두 땅의 머리라 할 수 있습니까? 달을 하늘의 눈이라 한다면 어느 때는 둥글고 어느 때는 이지러지는 것은 웬일이며 산을 땅의 머리라 한다면 어떤 것은 뾰족하고 어떤 것은 뭉툭한 것은 웬 일입니까?

달은 열렸다 닫혔다 하지 못하는 것이거늘 이를 눈뜬 것으로 함이 옳을까요? 산은 움직이거나 정지하거나 하지 않는 것이거늘 이를 머리를 들었다 함이 옳을까요? 선고께서 기뻐하시며 말씀하시기를 「그는 그렇다 치고 네 맘대로 시 한수를 짓되, 바람이든 달이든 이치에 맞지 아니함이 없도록 하여 보아라」공은 즉석에서 한 절귀를 지었으니 「발이 엷음에 바람이 먼저 꿰뚫고 처마 끝이 듬성하매 달을 엿보기 쉽구나.

밝은 밤 천만가지 경치는 그림 그릴만하고 또는 시를 지을 수 있구나.」 선고께서 공을 무릎에 앉혀 놓고 말씀하시기를 「나 역시 이보다 더 잘할 수 있으랴」하셨다 한다. 7, 8세 때 시와 문장이 월등하게 진취되어 두보(杜甫)의 북정시와 한유(韓逾)의 남산시와 범수(??) 채심(蔡沈)의 전기(傳記)와 가의(賈誼) 동중서(童仲舒)의 전국책(戰國策)등을 한번 읽으면 잘 외우는지라.

선고께서 또 한고조(漢高祖)론을 시험해 본즉 순식간에 50여 줄을 외우는지라 사람의 의표가 뛰어 남으로 선고께서 크게 기뻐하시며 문장과 시가 잘하고 잘못함이 없으니 내 가문을 크게 할 자는 네게 있으리라 하셨다.

일찍이 같은 또래 5, 6명 아이들과 나가 놀 때 혼자서 큰 나무 밑에 앉아 모래 위에 손가락으로 글자를 쓰며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아니하므로 한 아이가 시험 삼아 공(公)이 차고 있는 새로 산 칼을 감추어두고 거짓 놀라는 척하며 말한즉 공(公)은 정색하고 하는 말이 얻고 잃는 것은 운수소관이니 어쩔 수 없다 하거늘 그 아이가 부끄러워 돌려주었다.

이렇게 그의 어린 나이로 큰 도량이 있음을 모두 알게 되었다. 하루는 어떤 관원(官員)이 소리 높여 떠들며 지나갈 제 여러 아이들은 혹은 달아나고 혹은 숨어 버리되 공은 길 왼편에 서서 팔짱 끼고 움직이지 않거늘 관원이 이상히 여겨 말에서 내려 나이 얼마냐고 물으니 공이 육갑(六甲) 간지(干支)로서 대답하니 관원이 조롱하며 나이 몇 살이냐 한즉 공이 대답하되 육갑도 모릅니까? 하니 관원이 웃고 손꼽으며 말하기를 양반 댁이니 문필도 잘 하겠구나 하며 구름이라 제목 삼고 구름운자를 부르니 공이 즉시 대답하되 「웃으며 산 남쪽에 나오는 구름을 보는데 어디서 오는 관원이 늦게야 구름 보고 울부짖는고. 무심코 중천을 지나가려 할진대 둥둥 떠서 햇빛가리는 짓일랑 하지 말게나.」 관원이 말하기를 네가 비록 나를 조롱하였지만 또한 나를 경계함도 되니 꼭 후일에 크게 등용되어 충성을 다할 것이로다 하고 지필묵을 내주며 치하하고 함께 가자고 하거늘 공이 대답하되 부모님이 계시는데 내 맘대로 어찌 가겠소? 하니 관원이 또 생선포 등을 내주며 부모님께 드리도록 하라 하였다 한다.

9세 때 염수재(念修齋) 류공(柳公)진석(晋錫)이 공의 이름남을 듣고 찾아 왔었는데 때마침 공의 아버님이 매계(梅溪) 이생(李甥)의 집에 가시고 돌아오시지 아니하여 공이 보기에 도포에 큰 띠를 두르시고 메투리신에 대지팡이를 짚으신 점잖고도 도학이 있는 기상이므로 급히 나가 모셔 드려 좌정하신 후 유공께서 소나무를 가르치며 운자를 부르니 공이 무릎 꿇고 대답하기를 「열 아름 되게 동령에 서있는 소나무는 눈을 맞고 바람에 시달려도 모양변치 않네.

재목으로 크면 후일에 큰집을 부지하련만 백년이나 지킨 절개는 진나라의 봉후를 싫어하리.」유공이 등을 어루만지며 탄식하는 말씀이 「내가 이 세상에 이 태백과 두자미를 보았도다. 더구나 시에 수절과 부국 한다는 뜻이 있음이랴.」 공이 다시 무릎 꿇고 말씀하시되「어쩐 말씀이십니까? 이것이 사람으로서 할 일 인줄 압니다.」

유공이 말씀하시되 「사람답게 되는 길은 또한 고상하고 원대하며 행하기 어려운 것만이 아니라 다만 자식으로서 효도하며 신하로서 충성하며 어린이에게 겸손하며 아우에게 우애 하는 것이 이 길이니 사람으로서 이것을 잘한다면 사람의 도리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맹자가 말씀하시기를 순임금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이랴. 하기만 하면 또한 같을 것이다 하였으니 성인이 어찌 나를 속였을 것이냐.」 공이 말씀 드리기를 「사람이 부모를 모시는 이 없지 않을 것이니 나를 낳아주신 덕을 잊을 수가 없으며 사람이 임금을 모시지 않는 이 없으리니 나를 먹여 살리는 덕을 보답함이 없다오리까.」

유공이 말씀하시되 「사람이 다 부모가 있건만 부모를 잊은 자 많고 사람이 다 임금이 있으되 임금께 보답하는 자 드무니 이것이 슬픈 것이 로다.」공이 말씀하시되 「자식으로서 부모를 버리며 신하로서 임금을 배반하는 자 누굽니까.」 유공이 말씀하시되 「옛적에도 충효 하는 자와 불충효 하는 자가 있었으니 후일에 알게 하여 주리라.」 공이 잠잠하게 더 묻지 아니하니 유공이 크게 기특하게 여기고 말씀하시기를 「자네는 내 스승이 될지언정 내 동배는 아니로세!」하였다.

무신년 공의 나이 19세 때 장가들기 전 선고께서 돌아가시니 상중제도를 치르되 노성한 사람과 다름이 없이 피눈물을 흘리며 죽을 마시며 주야로 빈소를 지키던 중 마을 사람의 실화로 십여 집을 불태우고 빈소까지는 십여 거름 밖에 이른지라 공이 울면서 불을 향하여 하늘에 호소하였더니 갑자기 반대편에 바람이 북쪽으로부터 일어나 화를 면하였다.

수약동 선영 옆에 장례를 모시고 나서 시묘를 할 때 산간에 흐르는 물을 길어 조석상식을 올렸더니 얼마 안 있어 맑은 샘물이 자연히 시묘 여막 옆에 솟아나서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차가왔으며 물맛도 달고 향기로웠다.

그리고 옛사람의 문서를 가져다가 본받을 만한 것은 기록하여 좋은 것은 거상의 조목으로 삼고 자기의 평소 행하고 반성할 기본으로 하여 한 가지도 빠뜨리지 않도록 평소의 일용기로 삼아서 서문까지도 쓰셨다. 기유(1669)년에 영위(?筵)를 받들어 모시고 어머님과 산내면 발전리로 이사하여 봉양하는 음식이나 혼정신성의 절차를 소학에 정한대로 행하였으며 일의 대소를 가리지 않고 반드시 어머님께 품신한 뒤에 순종하였으며 이웃 마을의 출입도 또한 반드시 고하였으며 어머님이 즐겨 하시는 것은 힘써 구별하고야 말았으니 겨울철에 잉어회를 소원하시면 앞내에 나가 낚아왔으며 가을철에 새 생 고사리를 원하시면 뒷산으로 가서 뜯어오되 얻지 못한바 없었다.

한번은 남촌의 자형((妹夫) 송씨 댁에 가서 겨우 하룻밤을 묵었는데 마음이 울렁거려 부랴부랴 돌아와 보니 과연 어머님이 가벼운 병환이 계셨었다. 어머님이 기뻐하시며 말씀하시되 옛날에 백유(伯兪)란 사람의 어머니가 팔을 삐었을 때 아들이 절로 돌아왔다 하더니 이제 내가 가벼운 탈이 났는데 네가 돌아오니 너는 그 백유와 같구나 하셨다.

경술년(1670)에 탈복하자 오랜만에 어머님의 말씀을 따라 유공께 나아가 가례와 근사록의 가르침을 받았다. 남전 김천정공 능다리 송인양공과 동문이 되어 도의로 친구가 되었다. 김공은 높은 문장가이며 행실이 엄전하여 기상이 한 고을을 누를 만하였다.

대개 나이가 자기보다 어린 사람과는 친구 되기를 허락하지 않는 터이지만 홀로 공이 자기보다 6세나 어리지만 바로 친구를 삼았고 송공은 비록 문장은 짧지만 효도와 우애와 화목하게 지내므로 부형들이 중히 여기는 처지였다.

그때는 류(柳)공이 운주사(雲住寺)에 머물러 있어서 두어 달 동안에 상례(喪禮)와 복제(服制)에 대한 의심나는 점을 모두 배웠고 11월에는 또 판북으로 따라가서 대학을 배웠다. 유공이 담양부 대실 고향으로 돌아가시게 되자 하루 전날 밤에 근사록의 의심나는 점을 해석하는데 다음 날 새벽에 이르도록 하였으며 여기에는 송공도 함께 하였다 한다.

이에 돌아와 어머님을 뵈올 때 말씀이 관곡(寬谷) 최서림(崔瑞琳)공이 학도를 이끌고 고현의 귀암(龜巖)서당에 계시다 하므로 곧 공과 송공이 따라 가게 되었다. 최공은 본시 경기 사람으로 젊어서 소동파의 시를 연구하였다 하며 호곡(壺谷) 남용익(南龍翼) 때문에 알게 되었으며 진사(進士) 과거(科擧)에 합격하여 늦게야 참봉(參奉) 벼슬을 제수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비록 학문으로서 자랑은 하지 않지만 천품이 도에 가까우며 덕용이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사람 보는 법에 밝고 사람을 인도하여 도와주기를 좋아하되 거처를 자주 옮겨 숨거나 학식을 감추어 가까이 지내는 이가 적었다.

오직 남전 김공은 한번 보고 존경을 다하여 자질을 부탁할 정도이고 은계(銀溪)의 김만정공(金萬?公)(또한 남전이라 호하기도 한다.)육우당(六友堂) 송이석(宋以錫)등도 또한 존경할만한 친구라 이르고 있었다. 공이 학업에 대하여 물었으니 대개 최공은 말없이 동정과 예능의 세밀한 것까지 반드시 사리에 따라 깊이 살피는 것으로 규율을 삼았으며 믿음직하고 존경할만하여 자못 옛날 70자(주 공자(公子)제자(弟子) 70인(人))의 열복함과 같아서 유공께서도 한번 만나 보고서 함께 일을 할 정도 이었다. 어찌하랴. 유공이 일찍 돌아 가셨으니 오로지 최공에게 의지하게 되었고 최공도 또한 지기로서 허락 하게 되었다.

대개 동문으로서는 월곡(月谷)유종흥(柳宗興)을 공이 추앙하였으나 한 때 수제자로는 공으로 그 으뜸을 삼았었다. 공은 소시부터 공명에 급급하지 않았으므로 최공이 특히 공의 가문이 쇠퇴함을 생각하여 강의하다가 여가에 과거 보기를 권하였으므로 공도 드디어 어김없이 힘써 따르기로 하였다. 갑진(1724年)에 영남종친들과 선영묘소를 수리하고 아울러 족보를 만들어 이에 서문을 쓰셨다.

정묘년(1687年)에 어머님이 병환이 나서 약과 음식 수발을 할 때 변을 맛보며 하늘에 축원을 드리며 단지(斷指)하려 하였으나 집안사람에 발각되어 곧 칼로서 하지 못하고 돌로 깨뜨려 피를 흘려 넣어서 다행히 수개월 더 생존하시게 하였으나 끝내 당고하게 되어 초상 절차로부터 성복 때까지 물 한모금도 들지 않기에 최공이 억지로 권하자 한 모금 마시고는 그만두고서 몸부림치며 통곡하였으나 예절에 맞지 않음이 없었고 장례를 치르고 나서야 미음을 마셨으며 또 시묘를 하였다.

몸소 상식을 지어 올렸으며 영연에나 분묘 돌아보기를 눈비가 와도 폐하는 일이 없으니 가벼운 병이 있다 하여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으며 여름에는 잡초 뽑기 겨울에는 눈 쓸기를 하여 언제나 요대를 풀어 본 일이 없고 목욕도 폐함이 없었으며 삼년을 이를 보이지 않으며 과실을 먹지 않으며 조석으로 곡을 한 연후에는 오직 예기(禮記) 또는 가례비요를 훑어 볼뿐이었다.

산중에는 예로부터 호환이 많아서 백성들과 가축을 지켜 나가기 어려웠다. 하루 저녁에는 범이 여막에 달려와 크게 소리쳐 기세를 부리려 하거늘 공이 나가서 말씀하기를 「너는 산중의 임금일 텐데 역시 멍청하고 완고하구나. 어찌 그리 산에서 뛰쳐나와 잔학을 부리느냐.」 하시니 범이 곧 머리 숙이고 가버렸다.

또 새끼 가진 개가 있어서 이름을 부르면 따르기에 사령할만하나 젖을 먹이려는 것을 보고 공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만일 여기에 있어서 혹 내가 정성 드리는 것을 방해하지마라 한즉 개가 문득 어디론지 사라져 간곳을 모르게 되었다.

공은 혹시 범에게 죽었는가? 의심하였더니 4, 5일후에 바위틈에서 그 새끼를 거느리고 돌아왔다 한다. 이때에 남전께서 신병으로 누운 지가 여러 달이라. 공은 날마다 십리 길을 왕복하였으며 그가 죽으니 임종을 내 친척처럼 여기다가 복을 벗고서야 집에 돌아와서 비로소 주육과 채과를 여느 때처럼 하였다.

부모님을 생각하는 정성은 연회에도 나가지 않으며 노래와 풍악을 듣지 않으며 날마다 사당과 묘소에 배알하기에 더욱 부지런하였고 기제사 때마다 석 달 전부터 소찬으로 지내며 바깥사랑에서 잠잘 뿐 아니라 조문도 아니 가며 경사에도 나가지 않고 3일 전부터 목욕을 하되 매일 세 번씩 하였다. 제사에 쓰는 그릇은 손수 씻었으며 꿩과 닭의 털을 뜯어버리고 은행과 밤은 그 껍질을 벗겨서 함께 청결한 곳에 감장하여 어린애나 개와 고양이가 더럽히지 못하도록 하여 물품은 극히 정갈하게 몸가짐은 극히 자상하게 하였다.

제삿날에는 정갈한 의복을 입고 제사에 임하고 새벽엔 신주를 모시고 생존하신 것처럼 하여 그 곡하는 모습이 초종상 때와 다름없이 봉행하시었다. 뒤늦게 닭이나 꿩을 바치는 사람이 있어 공의 반찬으로 하시라 청하면 공은 말하기를 망극한 날에 어찌 자봉을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물리쳤다. 공의 효심은 실상 더욱 더 지극하여 마을 이웃들을 교화케 하였다.

노신달이란 사나이와 김순상이란 여인이 있어 처음에는 부모나 시부모에게 효도할 줄을 모르다가 공의 마음 쓰시는 것과 사모하는 일들을 배우고서 하는 말이 은 선생님의 가르침이라 하며 마침내 효자 효부로서 골 안에 소문이 났다 한다. 대개 공은 하늘을 감동시키고 다른 짐승도 감동케 하며 우매하고 천한 사람까지 감동케 하였으니 훌륭하신 분이다.

공은 스스로 부모님 여의고 탄식하기를 과거에 급제하여 귀하다함은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함인데 부모님이 안계시니 내 누구를 기쁘게 하리요 하고 거침없이 과거공부를 폐하려한즉 최공이 오히려 더욱 권면하므로 공이 이에 따르지 아니치 못하였으나 그러나 좋아하지는 아니하였다.

스스로는 당시의 유행하는 문장과 맞지 않아서 다만 감시(도 단위 시험 또는 과거의 예시)에 세 번이나 갔으나 한번 장원하였을 뿐 끝내 이루지 못하였으니 아까웁도다. 을해년 (1695년)에 분한 일을 억제 할 일이 있어 말조심을 하고 신망이 두텁도록 힘쓰며 친척을 사랑함에 힘쓰기를 사철동안 스스로 마음과 행동을 경계하시었다.

정축년(1697년)에 자형 송익귀의 서거를 슬퍼하고 시마복을 치렀으니 또한 그가 어질기 때문이었다. 무인년(1698년)정월에 최공이 서거하니 빈소를 지킴에 장사지낸 때까지와 3년을 심상하되 과거에 나가지 않고 항상 최공을 사모하여 마지아니하며 말씀하기를 내 선생님 관곡은 공자의 문으로 친다면 안자와 증자의 열에 해당한다 하지만 나는 이를 감당할 수 없다.

공자, 맹자, 안자, 증자를 그처럼 독신하던 터라. 드디어 동창에 제창하여 용계서원을 만들어 모시게 하였다. 공의 아우로 정매라는 분이 있어 자는 화경(和卿)이오, 문장과 행실로 서로 힘쓰며 출입할 때마다 서로 함께 하였으나 갑신년(1704년)에 먼저 세상을 버리니 공의 애통함이 지극하여 장사 지내기전까지는 요질을 벗지 않으며 주육을 먹지 않았으며 송종에 있어 조카를 돌보아 주되 내 자식이나 다름없이 하였다.

이해에 모주(茅洲) 김시보씨가 이골에 부임하였으니 즉 농암(農巖)문간공 김창협의 족질이며 제자이기도 한데 내력이 그러기에 여덟 가지 조항규례로 읍내 선비들을 훈도할제 공이 선비들의 여망 있음을 알고 훈장으로 천거하여 자리를 바꿔가며 강의하도록 하여 향교로부터 무성서원 남고서원 모충서원 등 여러 서원을 돌아가며 술자리도 베풀고 운주사 갈매골등 경치 좋은데 에서 달마다 돌아가며 모임을 갖고 시와 문장을 짓도록 하면 수석은 공에게 돌아 가곤하여 일경이 추앙하게 되었다.

이것은 신영천(申靈川)이 도백이 되었을 때와 규암송인수(圭庵宋麟壽)가 도백이 되었던 이후로 일대성사였었다. 정해년 (1707년)에 부인 조씨가 서거하자 그의 어질고 효성 됨을 생각하며 자녀들에 방해가 될까 염려하여 다시 속현을 안 하고 을미년(1715년)에 장자 명윤(命尹)를 보내어 한양으로 가게 하였다가 병신년(1716年)에 요사하게 되어 슬퍼하며 말씀하시기를 내가 친상 때 죽지 못하고 어찌 이 참상을 당하게 되었는가 하였다 한다. 정유년(1717년) 숙종 임금님께서 온양으로 행차하실 때 나아가 복수하겠다 말하는 자가 있어 기뻐한 시가 있었으니 이것은 서인(西人)에게서 사숙한 바가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무술년(1718년)에 지은 시에 조정과 당론이 요란함을 개탄함 이였고 (1719년)에는 조정에서 양전(量田)법을 명하였으나 관원들의 등급사정이 고르지 못하여 한 고을 전체가 울음바다가 되고 선비들도 원통하게 죽은 자와 매 맞고 귀양 간 자가 많았었다.

공은 또 여러 차례 소장을 써서 풀어 줄 것을 청하였고 공은 효도하는 마음으로 나라에 표하듯이 열성의 기일이면 반드시 전후 3일간을 육식을 폐하며 연회나 음악을 폐하고 북쪽을 향하여 꿇어 앉아 아침부터 밤까지 근신하다가 닭소리 듣고서야 잠을 잤다 한다.

갑진년(1724년) 가을에 풍증으로 출입을 못하였으나 경종(景宗王)께서 승하하시자 교자타고 관문밖에 이르러 통곡하였더니 병환이 들어 교자로 돌아왔다가 이해 9월초 7일에 침실에서 서거하였다. 수75세였다. 장지는 선산을 따라서 자좌에 안장 되였으며 유고로는 2권이 있는데 집안에 간직하였다 한다.

공의 집안은 처음부터 심히 어렵지는 아니하였으나 상사와 제사에 자진하여 탕패하기에 이르렀다 하며 말년에는 더욱 간구하여도 마음을 바쁘거나 지조를 고치지 않고 일세의 부귀공명 보기를 뜬구름이나 초개같이 여겼었다. 어떤 사람이 장난말로 공의 나이 이제 팔순인데 어찌 고생을 자청하여 기아를 참고 책읽기만 하시요, 내가 들으니 이웃고을에 부자가 있는데 설사 재산을 기울일지라도 공의 문학과 지식을 바꾸기를 원한다 하니 응하시겠읍니까 아니하시겠습니까 하니 공이 웃으며 말씀하시기를 자네가 잘 모르는 말일세, 글 가운데는 맛이 있어서 어찌 고기 맛에 비하겠는가, 더구나 남의 재물을 받고 하루아침에 그 지각을 잃게 될진대 차라리 굶어 죽을지라도 하지 않겠네 하였다. 이것을 선비들이 미담으로 전하면서 이 노인이 궁하여도 더욱 굳음이 이와 같다 하더라.

공이 비록 불행하게도 여러 번 과거에 떨어졌고 조정에서도 그 명성 이 들리지 않았으나 학문하시는 공적은 어두워질수록 더욱 독실하여 위로는 공맹으로부터 아래로 주렴게 정이천 정명도에 이르기까지 또는 우리나라 여러 선유에 이르도록 먼저 문자 외우지 못함이 없고 그 말씀을 마음으로 본받아서 닦을 무렵에 세수와 빗질을 하고 관과 허리띠를 한 후 무릎 꿇고 않아 정신을 통일하고 깊이 생각하여 기어이 얻음이 있도록 하고 한발자국도 물러나지 아니하였다.

시에 지었으되 「남자가 늙었더라도 더 힘써야하며 90세에도 글 읽으면 숨어 살 수 있으리 또 하시고 「어릴 적에는 스스로 몸 닦기를 기약하였는데 늙어 쇠하였어도 의연히 성정에 어둡구나.」 또 하였으되 「기름불 켜고 날 샘 함은 사람의 몸이지만 누가 아르랴. 그 속에 또한 하늘이 있음을 만사가 종래부터 다 이러하거늘 스스로 내 마음을 다하면 진리가 자연 온전하리.」 또 하였으되 「사람이 사욕이 없으면 곧 천리이니 천리의 흐름도 다만 지성에 있네, 어떻게라도 사심을 온통 물리쳐 버릴 수 있으면 일이 이치에 맞을 것은 자연히 분명하리라.」또 하였으되 「성품과 마음을 수양함에는 재리에 혹하지 말 것이요 헌신하는 것은 도시 몸을 아끼는 어짐이니라.」 그 소학을 읊은 시에는 「나라 다스리는 법도는 집안 청소와 같은 것이요, 재앙을 멸하려면 모름지기 얼음 밟을 때처럼 해야 한다.」 또 하였으되 「지난 나이 80 가까이 뛰어 넘은 듯 한데 어리석게도 공경과 정성을 궐한 것이 부끄러워라.」 공이 저술하여 전하는 것이 이제 많지 않지만 곧 이것으로 오히려 그 있음직한 것을 측량 할만하다.

그가 대인접물하는 것과 친구 간에는 화락하고 조용하며 친절하여 겉모습만으로 하지 않으며 또한 처음부터 희학농담이나 성내지도 아니 하고 혼연히 봄바람의 기상 같아서 착한 것을 좋아하며 착함을 들추어내서 힘써 찬양하며 그것이 민멸될까 두려워하였다. 김시태의 처 허씨의 열행을 위하여 상소하기를 한번 두 번이 아니었음에서 볼 수 있다.

그가 사람 가르침에 있어서도 더욱 관곡선생의 법에 따라 각각 그 재능에 따라 인도하고 성실하고 부지런하되 성의껏 부드럽고 온화하게 하므로 원근에서 책을 들고 모여드는 자 몇 백 명인지 알 수 없었다.

대개 모든 선비들로 행의가 있고 집안이나 골 안에서 칭송을 받는 자는 물어볼 것 없이 모두 공의 제자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본 현원으로 온 이도 도임한지 3 일이면 반드시 와서 문후 드리는 것이 상습이 되었다. 응교로 있던 임상덕도 그가 은주사에 강의할 때에 공을 위하여 수작과 화답하여 융숭하게 하였다.

공은 오직 한결 같이 겸손하여 학행으로서 자랑하지 않으며 자기 아호를 뚜렷이 나타내지도 아니하였다. 중년에 내동 덕봉 마을에 살 때는 그 호를 숭덕(崇德)이라 할뿐이며 만년에 수약동 선추마을에 살 때는 곧 그 호를 수약(守弱)이라 할뿐이었고 또 척천으로 옮겨가서는 그 호를 고쳐 백계(栢溪)라 하였을 뿐이었다.

덕이란 높여야 하는 것이요 약속이란 지켜야 하는 것이며 잣나무 백자를 귀화한다는 뜻이며 더욱이 춘운 때라야 정절을 표시하는 뜻도 되므로 백계라는 호는 이로써 사람 간에 가장 드러났었다. 공은 또한 어둔 데에 햇빛 같은 군자가 아니었으랴.

대개 일찍이 볼 것 같으면 태인 현지의 기록에 그 골이 작기는 하나 문헌이 대대로 일어나 최문창, 신영천 같은 고관들의 자취가 있어 진실로 상하에 빛이 났으며 이골에서 태어난 이 가운데 또 눌암 송세림공, 성재김약묵공, 묵재 정언충공 명천 김관공의 넷 군자가 거개 성공하였으니 인재가 계속 이어짐일까! 향리에서 볼 때 공에게 기우하였든 불우한 정극인 일재 이향등은 조야에서 다 소문난 이들인바 명성은 손색이 있어도 공적은 비등하였다.

현판을 하사하심으로써 조두는 빛났으나 관곡도 또한 공에게 기우하였었다. 근세에 제자들의 번성함과 끼친 은택이 멀리까지 이른 것은 더욱 여러 어진 이에 뒤지지 아니하였으니 공의 성취가 이뤄진 것은 또한 높도다. 관곡의 후손으로 백대 후라도 이 말은 거짓이 아님을 거의 알아주리라.

공이 후학을 버리신지 25년이로되 한결 같이 공평하기를 신유년 국금으로 죽은 자로서 은게 김공이 함께 관곡의 용계서원에 배향케 된 것은 이게 오히려 조그마한 위안이 된다 하겠으나 국금이 재발하여 마침내 20년 만에 철폐를 면치 못하였음은 거듭 슬프도다. 하늘이 반드시 회복하여 주시려니 오히려 기다림이 있을 뿐이로다.

오직 이 행적을 만드는 역사가 비록 문하생을 거쳐서 시계(市溪)김상렬공의 결정한 바이지만 또한 완전히 판각에 이르지 못하여 은공의 수덕을 전송함에 있어 그 집 어른으로써 나에게 명하게 되었으니 내 선친 만은(晩隱)님께서는 또한 약관 때에 공의 문하에 출입하셨고 나는 또 남전(藍田)공의 외증손이라 증감 수정하기를 위촉함이 심히 지극함으로 능히 말할 줄 모른다고 굳이 사양할 수가 없고 또한 오직 선친15세 이전부터 내 증조부 귀암(龜巖)선생께서 배우셨고 우암 송선생을 알게 되셨음을 생각하면 3대를 전하여온 내력과 조실부모하여 위양에 의탁 되어온지 여러 해가 되었다가 다시 공에게 귀의 하였는데 공이 돌아가셨었다.

또 시마복을 입고 제전을 드리려니 늙어서야 강복케 되었으며 항상 끈덕지게 사제 간의 실마리로 논한다면 우리 형제가 다 이제 60이 넘었는데 하물며 이제 의지할 곳 없는 생각이야 다시 어찌 하리요. 삼가차례로 엮어서 위와 같이 갖추노니 이 세상 대군자의 덕을 아시는 이는 참고하시요.
삼가 쓰노라.

숭정三신축(1781年) 우리성상 정조(正租) 5년 겨울 10월에
후학 어모장군 전행 세손 익위사익찬 월송(越松) 황윤석

1889년 정해보 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