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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휘자는 정(廷) 신라 문성왕 때(서기850년) 사신을 보내어 글 잘하는 학사를 청하여 예악을 가르치겠다 하매 당나라 왕이 8학사를 보내어 가르치도록 하였으니 8학사는 곧 은(殷)씨 홍(洪)씨 기(奇)씨 길(吉)씨 봉(奉)씨 목(睦) 씨 방(房)씨 위(魏)씨로서 공이 그중 한분이시다. 신라 조정에서 벼슬이 태자태사에 이르렀고 고려조에서는 벽상 삼한삼중대광 문하시랑 태자태사 보문각대제학의 벼슬로 추봉하였고 시호는 정양공이시다.

생졸년월일 미상. 처음 경기도 고양군 옛 행주에 사르셨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군 파평산 서쪽 기슭에서 동쪽 10리쯤의 묘좌원이다. 배위는 정경부인 연안 이씨이며 연안백 이무의 후손이며 생졸년월은 미상. 묘는 공의 묘와 동원이나 실전되다.

충렬비는 고양군 서남쪽 25리쯤인 원당면 구파발의 두어마장 쯤인 하파발 명릉 한쪽 큰 길가에 있었으나 실전됨.

8학사께서는 당나라에서 오실 때 곁의 형제를 하시고 남양땅 어풍정에서 각각 시 한귀씩을 지어 4운 한수를 이루었으니, 「금수강산 오르자니 까마득한데, 발걸음에 닿는 층암은 태양에 가까워라. 구만리 북두성에 신발끄는 듯하고 삼천리 동해는 치마 걷고 갈만하네. 서쪽 돌아보니 연경의 황제 섭섭하고 동쪽 바라보니 일본 왕 사로 잡아보리. 명승지의 무한한 경치 대강 살펴보니 하늘로 대붕 새 타고 날아가는 듯하네.」

구보에서 전한 바는 공의 묘소가 파병산 서쪽 기슭에서 동족으로 10리쯤 묘좌로 모셨다 하나 여러 차례 탐사하였어도 찾지 못하고 부득이 용인군 이동면 서리상반 무봉산 남쪽기슭 자좌원에 계유년(1992년)에 단을 모으고 제사를 지낸다.

신라 효공왕때 벼슬이 상대등 혹은 대각선 .고려조에서 태보로 추봉되시고 시호를 충숙이라 하다. 효공왕 15년(서기911년) 왕이 천한 첩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으므로 대신 은영(殷影)이 간하나 듣지 않기 때문에 영이 곧 그 첩을 잡아 죽였다. (삼국사기 동사강목에 기록되다) 그 마음은 대개 임금을 아끼며 충성하는 지성에서 이었을 것이다.

생졸년월과 배위의 성씨는 전하여 지지 않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군 지도면 행주외리 177번지 24호 덕양산 북쪽 기슭 자좌원에 있으며 석인 상석 망주가 있음. (1938년에 후손 은세룡공(殷世龍公)이 실전된 것을 찾아 확인함) 당초 비석이 있었으나 잃어 버려서 1979년 5월에 다시 세웠음.)

고려 태조조에서 벼슬이 원보겸 하군대부. 태조7년(서기924년) 7월에 후백제왕 견훤이 아들 수미 강양검들로 조물군에서 처 들어 옴을 당하여 태조는 군사를 셋으로 나누어 대상과 제궁으로 상군을 삼고 원윤과 왕충으로 중군을 삼고 은녕과 박수경으로 하군을 삼아 싸웠는데 상군과 중군은 패전하였으나 홀로 하군만이 승전하여. 태조가 가상히 여겨 원보벼슬로 승진시켰다.(고려사 92권 전기에 있다) 생졸년월과 배위 성씨 전함이 없다. 묘소도 전하지 않는다.

고려 광종 때 벼슬이 대광이시다. 송 태조 건융 3년 대광은상(殷相)을 보내어 송나라에 가서 방물을 보내다. 생졸년월과 배위성씨와 묘소도 모두 전하지 않는다.

동사강목에 있는 기록은 백제 의자왕 9년(서기649)에 장군 은상(殷相)을 보내어 신라의 옛 석토성 등 7성을 쳐 얻었다 운운이나 이것은 연대가 워낙 멀어서 동명이인이리라. 또 백제국에 은상(殷相)을 가진 이가 있으니 이는 백제의 강토(현재 중국산동지방) 백성 중에서 기용한 것이리라. 후백제에도 또한 은술(殷述)장군이 고려 태조와 싸우다 포로가 되었다가 전주로 놓아 보냈다는 기록이 잇다. (고려사 2권)

정종 원년(기서1035년) 을해 년 7월 정해 일에 감찰어사에 승진하다. 생졸 년월 과 묘소 모두 전하지 않는다.

문종조에서 벼슬이 중윤에 이름. 문종 원년(서기1047년) 가을 7월 초3일에 직중대 은질(殷質)을 보내어 양도수군 광협 관달 영길과 더불어 8음도수군을 제압하게하여 적을 사로잡은 공으로 다함께 중윤벼슬을 주었다. (고려사8권과 95권)

생졸년월과 배위성씨 및 묘위는 전하지 않다.

문종조 현능실 시위대장군 무종13년(서기1059년) 5월 현능실 시위대장군에서 해임됨(고려사8권)

문종조에서 벼슬이 문하시랑이시다 문종205년(서기 1071년) 12월 26일 비서소감 우부승선의 벼슬에 오르고 얼마 안 되어 문하시랑에 오르시다. 시호는 문충공. 서기 1070년경부터 이때에 유학자인 신하로 문도를 세운이가 12도가 있었는데 시중최충 정배걸 참정노단 제주 김상질 복사 김무체 시랑 은정(殷鼎) 평장 김의진 황영 유감 시중문정 시랑 서석 외에 한분 등이 유명하여 세상에서 12공도라 칭한다.

그중에도 문충공 은정(殷鼎) 문헌공 최충 홍문공 정배걸이 가장 유명하였다 한다.(고려사8권 95권) 생졸년월과 배위성씨 전하지 않는다.

공은 젊어서부터 벼슬길에 뜻이 없어 무등산(전남광주)에 은거하며 소박하게 거처함을 즐겨하셨다. 숙종8년(서기1103년) 겨울 10월 24일에 초서를 내려 무등산처사 은원충(殷元忠)을 불러 드렸으나 이러나지 않고 여러 번 불러도 움직이지 안이하여 세상에서 이름이 존중되었다. (고려사 세가 12권)

예종 원년(서기1105년)11월에 내시지우 기록연 주부동정 은원충 사천소감 허진경 최자호 등을 보내어 동쪽 경계산천을 두루 살피게 하였더니 도선의 말로써 남경(한양)에 도읍을 개창하여야 왕조가 무궁하게 된다는 상서를 올렸다.(고려사 전기 35권) 생졸년월과 배위성시는 전하지 않는다.

신종조(서기1198년부터 1204년까지) 벼슬이 삼도 도지휘사이셨다. 생졸년월과 배위성씨 및 묘는 전하지 않는다.

고려 고종조에서 벼슬이 문림랑상의국 직장동정이셨다.

충렬왕조에서 벼슬이 문하시랑평장사 상호군판병부사이셨다. 충렬왕 5년(서기 1279년) 3월 갑인일에 낭장 은홍순(殷弘淳)을 보내어 화문 큰자리를 원나라에 가서 드리게 하다.(고려사29권)

충숙왕조에서 봉상대부민 부의랑 증금자광록대부 문하시랑이 되셨다.
배위는 정경부인 수령 위씨 그 아버지는 선(璇)이오 중현대부판도 총랑이다. 슬하에 일남일녀를 두셨다.

충혜왕조에서 벼슬이 문하주서삼중대광이셨다. 묘는 용인군 이동면 서리 사리치 자좌원인데 그후 실전하다. 배는 정경부인 인동 장씨 묘는 전하지 않다.

충목왕조에서 벼슬이 직제학이셨다. 묘는 선친 묘 동원 자좌인데 이제 실전하다. 배 숙부인 춘천 왕씨

어떤 곳에는 신윤(辛尹)이라 함. 충정왕조에서 성균박사로서 경주 부윤이 되셨고 신유년(1381년) 2월에 보문각대제학에 승진하셨고 시호는 양렬공이다. 숭양 경현 두 사당에 모셨다.

공께서 일찍이 고부군에 살으셨는데 이가정곡과 관동지방 유람할 때 서남으로 돌아 지나면서 은(殷)학사와 시의 화답이 있었으니 그 시에 「싱싱한 높은 절개 풍상 없수이 하나 펴진 가지 우거져 물 푸르게 새겼네. 묵화 그려 달랐더니 묘수를 휘두르니 가정자네 집 인양 앉아있네」

가정이 화답하되 「얼굴엔 봄빛인데 귀밑은 서리인가 풍류로 늙어도 젊은이 같구려 세상살이 어떻게 선생처럼 즐길까 더욱이 청산이 둘러있어 그림집 이로세」

묘소는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서리 산 151번지 싸리재 상반 자좌임. 난리격고 오랜 세월에 묘를 실전했다가 다행히 동민의 전하는 말이 은학사 사폐지라 하므로 지난 무인년(1938년) 봉분을 헐고 보니 광회위에 아홉 글자의 지명이 있어(고려국 직제학 殷莘尹) 바로 봉분을 수축하고 비석을 세웠는데 향산수파징 윤영구의 비문에 후손 성학의 글씨엿다. 배위정경부인 평택 임씨. 공의 충절은 여말 충의제현중에서 정절로 모셨다. (경현사지와 여말 충의 열전에 실려 있다.)

공민왕조에서 벼슬이 예부참의이셨다. 묘소는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선석동 아래 까치마을 뒤 기슭 경태룡 유좌(1800년). 경신에 비를 세우다. 판서 황승원이 비명을 짓고 후손 우집이 쓰다. 배위(配位) 정부인 순천 박씨 그 아버지는 부령추이다. 1남1녀를 낳으셨다. 묘는 합장. 여 김유성첨사 유성의 여서는 생원 우석규 석규의 여서는 이간공 평산 신 영. 영의 아들을 도사 신승서 참봉 신(申)광서의 여서 목사 송(宋)영 황강 김계휘의 아들은 김장생이다. 구비가 오래되어 석태가 끼이고 자획이 모호하며 선조와 사적이 유류된 것이 있어 계축년(1973년)에 추기 개비하였음.

자는 용보. 호는 월담 이태조 5년(1396년) 병자에 생원으로 문과병 제6위에 올랐다. 경상도 도사. 영천군수. 수원부사를 지내면서 치적이 있음으로 우헌납에 불러 오르시고 또 진주목에서는 객사를 수리함에 호정 하륜이 보고하여 1406년에 경주부윤이 되셨고 1409년에는 제용고사로 불러 오르시고 1420년에 이조판서로 승진하셨다. 송가사에 배향되어 공산 송(宋)준필이 상량문을 지였다.

구보를 살펴보면 묘소가 성주에 있다하나 임진왜란을 겪은 후 실전되었다. 1906년에 제단을 군위군 소보면 대송촌 뒤 오류골 언덕에 모셨다. 척암 김(金)도화가 신도비문을 짓고 남양 홍재삼이 쓰다.

공이 저술한 문자는 모두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리고 단지 추흥정의 현판에 시한연귀가 남아 동국시선 고금록 책에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여기에 기록된 그 시에는 「사방에는 비단처럼 산이 둘려져 있고 한 가닥 물줄기는 유리 빛으로 흐르네」

배위는 정경부인 성주 이씨이니 소부윤 선주사 연(衍)의 여이며 조부는 판서 태무(台茂)이고 증조는 성산군 만년(萬年) 농서군공 장경(長庚)의 현손이다.

공은 셋 아들을 두셨으니 현(顯) 보(輔) 익(翊)이요 여기서 삼파로 나뉘었다.

공의 묘를 실전한 후 단을 모우고 제사를 지내던 중 신미년 서기 1991년에 옛 인동면 시미리에 은판서 묘가 있다는 동네 사람들의 구전을 듣고 공의 묘에 배위 성주 이씨 합폄된 것을 확인하고 옛 단소 자리에 실묘(實墓)로 이장하였으며 배위도 합폄으로 모셨다. 좌향은 자좌 또한 을해년 1995년에 묘비와 문관석 망주등 일절 수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