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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제단봉성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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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에는 경기도 파주시 파평산 서록동변십리허 묘좌원(卯坐原)이 우리 시조(始祖)이신 정양공(定襄公)의 묘소(墓所)로 기록되어 있으나 아직까지 이를 찾지 못한 후손(後孫)으로 그 죄스러움 금할 길 없다. 그러나 전북 정읍시 고부면 반래(半萊) 영모제(永慕齊)에 시조(始祖)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매년 춘향제를 올리므로 시조추모에 대한 명분을 이어온 셈이다.

그러던 중 재경종친회가 조직되고 이를 계기로 1977년 대종회(大宗會)가 결성되어 지방 종친회(宗親會) 및 문회(門會)를 지회(支會)로 두는 등 종친회(宗親會)가 활성화됨에 따라 조상(祖上) 추모(追慕)사업(事業)의 일환으로 매년 전국에서 많은 종친들이 2세조(世祖) 태보공(太保公) 묘소에 모여 추향제(秋享祭)를 올리게 되었다. 추향제(秋享祭)를 올릴 때마다 시조(始祖)의 묘소를 찾지 못한 것을 감히 한탄하여 시조(始祖)묘소(墓所)를 찾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묘소(墓所)의 정확한 위치를 탐문한 바 천여년의 세월이 흘러 묘가 유실 실전(失傳)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으며 묘소로 기록된 장소 또한 휴전선(休戰線) 부근 군부대 내에 있어 묘소(墓所) 찾기는 초기단계에서부터 여러 가지 어려운 상태에 봉착(逢着)하였다. 주둔 부대를 방문 문의 한 바 묘(墓)의 위치는 현 파주시 적석면 마지리 앞 산이며 군 사격장 후편에 고묘(古墓)가 있다는 것을 알고 1984년 대종회(大宗會) 운영위원회와 총회에 이 사실을 보고한 결과 현지를 답사(踏査)하여 묘소(墓所)를 찾아서 성역화(聖域化)할 것과 아울러 만약에 묘소를 찾지 못할 시는 제단(祭壇)을 봉설(奉設)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 결의(決議)에 따라 수개월간에 걸쳐 대종회(大宗會)의 주도 아래 희천(熙天), 종태(鍾泰) 종친으로 하여금 현지를 조사케 하던 중 마침 파주 파평산 부근에서 공장을 경영하고 있던 판관공파(判官公波) 후손인 종두(鍾斗) 종친을 상면(相面)케 되었다. 종두(鍾斗) 종친은 남달리 숭조(崇祖) 앙모(仰慕) 정신이 깊어 행주 은씨 세승(世乘)(가보)을 보관 소지하고 있었다. 이 세승(世乘)에서는 시조비(始祖?)가 연안(延安) 이씨라 기록되어 있었으며 파평산 일대가 연안(延安)이씨의 종중 산 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현지 연안이씨 종친회장인 이의준(李儀俊)씨와 유지들이 옛날 관직이 높은 연안이씨의 인척(姻戚)묘(墓)가 파평산에 있다는 구전(口傳)이 전래된다 함에 족보에 기록된 시조묘(始祖墓) 위치와 현지의 구전 등 여러 정황을 분석한 결과 파평산에 시조묘(始祖墓)가 실존하리란 신빙성(信憑性)이 있어 희천(熙天), 종태(鍾泰), 종두(鍾斗)종친 그리고 연안이씨 대표 이의준씨와 유지 수명이 현지를 답사하여 고묘(古墓)수기가 산재하여 있음을 발견하였으나 대부분의 묘가 비바람에 훼손(毁損) 황폐(荒廢)된 상태였으며 이의준씨가 지목하는 묘(墓)가 좌향(坐向)이 족보(族譜)상의 기록과 동일하여 묘제(墓祭)를 올리고 개분(開墳)하였더니 묘의 내형(內形)은 신라(新羅)시대의 것이나 소묘(小墓)에 불과하고 석축(石築) 석회(石灰) 등은 전무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타 근거(根據)가 될만 한 흔적(痕迹)도 없어 신라시대의 태자태사(太子太師)묘(墓) 라고는 믿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고 성분(成墳)하고 귀경하였다.

귀경 후 운영위원회와 지역대표자 회의를 소집하여 전기(前記) 사실을 보고하니 전 종친이 한 마음으로 시조(始祖)의 제단(祭壇)을 봉설(奉設)할 것을 결의하고 제단 설치장소와 규모에 대하여 협의한 결과, 첫째 제단 설치장소는 시조(始祖) 정양(定襄)공께서 처음 삶의 터전으로 정하셨고 행주(幸州)은씨(殷氏)의 본관지(本貫地)이며 2세조(世祖) 태보공(太保公)의 묘소가 있는 고양시 행주외동 177번지 24호를 최적지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묘역(墓域)이 타인 명의의 토지였으며 이를 취득키 위하여 전 종친이 협심하여 자금 조성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수년간 토지명의자와 접촉하였으나 양도(讓渡) 불응(不應)하므로 마침내 묘역(墓域)연고권(緣故權)을 주장 서울 지방법원 남부지원으로부터 토지점유보전 가처분 판결(사건번호 90 카 1876호)은 받았으나 태보공(太保公) 묘역 보존에만 그치고 시조(始祖) 제단(祭壇) 설치장소가 확보되지 않아 행주에서의 설단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태보공(太保公) 묘역에서의 제단설치계획이 좌절(挫折)됨에 따라 우리 대종회 소유지로서의 양열공(襄列公)의 묘소(墓所)가 있고 무봉산등(舞鳳山嶝)을 중심으로 북록(北麓)은 박씨(朴氏)사패지(賜牌地)요 남록(南麓)은 은씨(殷氏)사패지(賜牌地)로서 일명 은박(殷朴)골이라 일컬은 유래가 서린 명소인 동시 양열공(襄列公) 의 제실(齊室)도 있어 이를 개축하여 시조(始祖)와 양열공(襄列公)의 제실로 이용할 수 있어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서리를 대안(代案)으로 택하여 설단(設壇) 작업을 추진하였다. 둘째 제단의 규모는 신라(新羅) 태자태사(太子太師)의 지위에 어긋남이 없도록 전국에 산재해 있는 왕릉(王陵)과 명사(名士)의 묘(墓)를 답사하여 그를 참고로 제단(祭壇)모형(模型)을 설계(設計)하고 그에 필요한 석물(石物)등의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설단(設壇) 추진에 있어서 본 취지를 발기하였으며 몸소 묘소(墓所) 찾기에 헌신(獻身)하고 설단(設壇)의 계획 착수 등 설단의 계기(契機)를 마련한 3ㆍ4대 대종회장(大宗會長) 희권(熙權) 고문 그리고 공사 진척에 있어서 자금 조성 등 제반애로사항을 타개하시고 공사를 계속하신 5ㆍ6대 대종회장(大宗會長) 성의(成義)고문과 8대 대종회장(大宗會長) 치안(致安) 고문 등 세 분 회장의 노력과 종친들의 적극적인 후원 및 단결에 힘입어 1984년 설단(設壇)을 착수하여 대제학(大提學) 양열공(襄列公) 묘역 청룡등(靑龍嶝)에 제단을 봉설(奉設)하고 고부 영모제(永慕齊)에서 봉향(奉享)하던 시조(始祖)의 위패(位牌)를 봉송(奉送)하여 제단(祭壇)내에 봉안(奉安)하였으며 전(前) 성균관 대학교 총장 문학박사 남계(南溪)조좌호씨의 비문(碑文)을 받고 필수(弼洙) 종친의 근서(謹書)로 단비(壇碑)를 세웠으며 총공사비 4,046만원을 투입 설단에 착수 8년만인 1992년 3월 18일 준공, 동년 4월5일 한식일을 맞아 전국 각지에서 모인 많은 종친이 참가한 가운데 시조(始祖) 정양공(定襄公)과 시조비(始祖?) 연안(延安)이씨(李氏)의 제단(祭壇) 봉설식(奉設式)을 성대히 거행하였다.

그러나 시조(始祖) 실묘(實墓)를 찾지 못하고 이를 과제로 남긴채 제단(祭壇)을 봉설(奉設)함에 전 종친은 아쉬움과 송구함을 금치 못하노라.

서기 1992년 4월